해나오해나
<페이스> 연작, <스템셀>, <손톱이라도>, <각자> 연작
해나오해나
<페이스> 연작, <스템셀>, <손톱이라도>, <각자> 연작
<페이스 Face> 연작
열 다섯 점으로 구성된 <페이스> 시리즈는 ‘얼굴’과 ‘대면하다’의 중의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열 다섯 점을 하나의 작품으로 보면 일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변화해 온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개별로 보면 특정 상황에서 스냅샷처럼 포착되는 생각의 편린을 대면하게 된다. 가령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다른 여성 형상들과 달리 뿌옇게 표현된 <페이스-문득>의 모습은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은 순간을 떠올리게 하고, <페이스-에헴>은 남이 씌어 준 가면이 나로 전이되는 순간을 생각하게 한다.
해나오해나 작가는<페이스> 시리즈를 통해 사회라는 규격화된 틀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획일성을 탈피하고 자신만의 유일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동판에 미세한 드로잉 선과 음영이 추가되어 점점 나이 드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여성의 형상은 개별 드라마를 상징하는 오브제와 결합하여 각기 다른 삶의 흔적을 지닌 인물로 재탄생한다. 작가는 “시간과 함께 회귀 불가능한 것이 되어 가는 우리 삶을 은유하는 방법으로 하나의 동판에 작업을 추가해 나가는 작업 방식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페이스> 시리즈는 삶의 일회성과 시간의 일방향성을 받아들이고, 지금 이 순간, 개별적인 존재인 자신을 인지하는 과정이다.
너의 세계에 오기 위해 납작하게 나를 눌러
얇은 틈새로 조심히 들어왔어.
같은 곳에서 와 다를 것 하나 없다는 납작한 존재로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날려 다녔지.
하지만 참을 수 없었어.
내가 납작하다니. 나에게는 그림자가 없다니.
오늘만큼의 주름을 그려 넣는다.
어제만큼의 감정을 칠한다.
납작한 내 세상에서도
그 모든 순간은 반복되지 않는
다 다른 드라마였다고 말해 볼까.
[작가 노트]
결심의 순간, <스템셀 Stem Cell> & <손톱이라도 Even a Fingernail>
<스템셀 Stem Cell>과 <손톱이라도 Even a Fingernail> 연작은 지난 10년 간의 드로잉 작업을 새로운 주제로 재구축하여 ‘과거’의 사고방식이 ‘현재’의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표현한 작업이다. 처음 그려지던 맥락에서 이미지의 일부를 잘라내는 행위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성을 인정하면서도 세상을 보는 관점과 태도의 변화를 인식한 결과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스템셀’은 현실의 단단한 ‘손톱’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손톱’ 또한 스템셀이 분화된 조직 중 하나다. 작가는 “우리들이 ’머리 속 세계(뇌내월드)’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순간들을 지나, ‘손톱’으로 대변되는 ‘작고 사소한 하나의 세계’를 선택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두 작품 속 이미지들은 상징적이며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우주 비행을 연상하게 하는 <스템셀>의 행성, 열기구 등의 형상들과 몸 없이 공중에 떠 있는 얼굴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의 세계를 표상한다. 색채가 거의 사라진 <손톱이라도>에서는 지상으로 수렴되는 존재들(낙하산과 연필, 장갑 등)을 클로즈업함으로써, 관점의 전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0년의 조우, <각자 Each> 연작
<각자 Each> 시리즈는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캘린더의 형식으로 발표했던 드로잉 작업을 기반으로, 각 해의 작품 주제를 현재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열 점의 작품이다. 작가에게 캘린더는 시간의 흐름을 물리적인 형태로 시각화한 매체다. ‘각자’라는 제목은 지인들에게 전달된 매체 속 이미지들이 작가로부터 독립된 개별적인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착안되었다. 하지만 길게는 10년, 짧게는 1년 만에 각각의 드로잉 이미지들은 다시 작가와 만났다. 작가는 <각자> 시리즈를 통해 원근감과 스케일감이 파괴되어 무중력 상태로 떠 있던 작은 인물 형상들이 땅에 발붙인 현실적인 존재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의 작업 방식에도 변화가 있다. 2014년의 드로잉을 재작업한 <각자-차곡차곡 접어둔 마음>과 2015년의 <각자-작은 정원>은 연필과 물감이 주로 사용된 반면, 2017년의 <각자-화창>은 연필과 디지털 도구가 함께 사용된 작업이다. 2018년의 드로잉을 기반으로 한 <각자-비가 와도>와 2019년의 <각자-스마일>은 화면이 평면적이다 못해 그래픽적 요소가 강한데, 2023년의 드로잉에 기반한 <각자-가만히>에 와서는 연필로 작업했던 첫 시작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열 점의 작품에 수공적으로 드로잉 선을 쌓아 올리며 지난 10년의 이미지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조우하고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각자> 시리즈는 지금 이 순간, 각자의 삶을 살아온 존재들의 변화를 인식하는 과정이며, 타자가 된 존재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