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g의 결심》
210gram Determination
《210g의 결심》
210gram Determination
2024 초대 개인전 《210g의 결심》
2024.12.04 - 12.15
초대작가 해나오해나
기획·글 이민아
전시 서문
210g의 결심
태도의 전환
해나오해나의 작품은 드로잉을 판화로 찍거나 피그먼트 프린팅한 후 여러 혼합재료를 사용하여 회화적으로 표현한 작업이다. 작가는 종이 위에 이미지들을 여러 층 쌓아 올리는 수공적인 과정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였다. 드로잉 이미지들은 인간의 형상부터, 식물을 모티브로 한 패턴, 연필과 낙하산 등의 인공물과 우주의 행성까지 그 범위가 넓으며, 사실적이기보다 상징적이다.
작가의 작업은 종이를 기반으로 한다. 여기서 210g은 작가가 십여 년 전 드로잉 작업을 재개했을 때 선택했던 종이의 무게다. 캔버스와 달리, 종이는 얇고 가벼워 섬세하고 정교한 드로잉 작업에 적합하며, 이미지들을 복제하는 데 흔히 사용되는 매체다. 그러나 작가는 종이를 선택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린 이미지들을 쉽게 복제될 수 없는 존재로 만들고자 한다. 작가가 선택한 에칭이나 피그먼트 프린팅 역시 동일한 이미지들을 수십 수백 장 찍어낼 수 있는 기법이지만, 해나오해나의 수공적 작업과 만나 유일무이한 작품을 만드는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열 다섯 점의 <페이스> 시리즈는 여성의 얼굴을 에칭 판화기법으로 찍을 때마다 주름살과 음영, 선들이 가미되어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작업을 반복할수록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여성의 얼굴은 작은 가면이나 봉투, 새 등의 새로운 요소들이 덧붙여지며 서로 다른 드라마를 지닌 개별적인 인물로 변화한다. 이런 이유로 210g의 종이는 작가의 태도가 전환되는 시작점이 된다.
스케치북과 아이패드를 오가며 드로잉을 해 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디지털 데이터로 보관되어 있던 자신의 창작물들을 소환하였다. 지난 10년간 캘린더의 형태로 가까운 지인들과 공유되었던 작가만의 서사가 깃든 이미지들은 처음 그려지던 당시와 동일한 모습으로 디지털 공간에 보존되어 있었다. 하지만 해나오해나는 “영원한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하며, 디지털 상태로 동면하고 있던 드로잉들을 깨워 열 점의 <각자> 시리즈로 재구성하였다. 나이 들지 않는 디지털 이미지에 세월을 입히겠다는 결심은 성찰의 과정 없이 과거를 반복하는 행위에 대한 거부이며, 동시에 개별성을 획득한 존재에 대한 존중에 기반한다. 과거의 순간들을 비가역적으로 변화시키는 작가의 작업 방식은 영원할 수 없고 반복될 수도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의식(ritual)의 과정이다.
해나오해나의 작품들은 은연중에 제라스코포비아(Gerascophobia)에 잠식되고 있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나이 드는 것에 본능적으로 걱정과 두려움을 갖는다. 하지만 삶을 구축하는 과정이란,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젊음에 ‘애틋한 결별’을 고하고 ‘나이듦의 현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스템셀>과 <손톱이라도> 연작이 포착한 지점은, 젊음을 복제하고 연장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불안을 간직한 채 기꺼이 단 하나의 문을 열고 나아가는 순간이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담히 수용하는 우리 개개인의 선택을 격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