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피는 마음》
Ever-Blooming Heart
《오래 피는 마음》
Ever-Blooming Heart
2026 김지혜 초대 개인전《오래 피는 마음》
2026.11.07 - 11.15
작가 김지혜
기획·글 이민아
장소 스페이스세컨뷰
전시 서문
이민아 (스페이스세컨뷰 디렉터)
원근도 중력도 지워진 공간에 시들어 가는 꽃이 떠 있다. 둥글게 엮은 꽃 리스(wreath)와 하트 모양으로 묶은 꽃다발이 보이고, 원형 테두리 안에 흩뿌려 놓은 듯한 들꽃도 눈에 들어온다. 만개의 시기는 지났으나 여전히 생기를 머금은 화사한 꽃부터 바스러질 듯한 마른 꽃까지, 시듦의 단계는 제각각이다. 때로는 촘촘히, 때로는 느슨하게 짜인 구조 속 유기적인 형상은 어딘가에 실재하는 꽃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한 걸음씩 다가설수록 꽃은 짙은 저채도의 면들과, 그 위에 세필로 그은 밝은 선들로 나뉜다. 멀리서는 꽃이, 다가서면 선이 보인다. 나이테의 결처럼 겹겹이 그어진 선들은 꽃잎의 굴곡을 따라 휘어지며 평평한 화면에 양감을 부여한다. 그 선들은 꽃잎의 결이 아닌 ‘시간의 결’이다. 그제야 허공에 부유하는 꽃들이 어딘가에서 시들어 가는 꽃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시간 속에서 피어 있는 관념적 존재임을 알게 된다.
김지혜는 ‘시든 꽃’을 통해 나이듦의 시간성을 탐구해 온 회화 작가다. 이번 개인전 《오래 피는 마음》에서 작가는 2023년부터 2026년까지의 최근작을 중심으로 총 21점을 전시한다. 이 가운데에는 <His flowers>(2008), <Dry flowers>(2014) 등 이전 작업도 포함되어 있어, 시든 꽃의 의미가 변화해 온 궤적을 함께 보여 준다.
김지혜는 “하나의 생명이 자라는 동안, 그 곁을 지키는 또 다른 생명의 시간은 어떤 의미로 남게 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돌봄은 ‘기다리고 견디고 반복하고 유지하는’ 노동이 지속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매일 되풀이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수행된 노동은 다음 날의 같은 노동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일상이 이어지려면 누군가는 그 시간을 감당해야 한다. 작가는 시들어 가는 꽃에서 “다른 생명을 지키고 길러내는 대신 사라질 수밖에 없던 자신의 시간”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 시간이 슬픔이나 허무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가는 가느다란 선을 하나씩 쌓아 올렸다. 무용(無用)해 보이는 시간이 기록되기를 바라는 염원 속에서, 선들이 모여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형상이 되었다. 매번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시시포스(Sisyphus)의 노동과 달리, 선을 긋는 반복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화면 위에 축적되었다. 미얼 래더맨 유켈레스(Mierle Laderman Ukeles)가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예술의 자리로 끌어올렸듯, 작가는 흔적 없이 사라지던 돌봄의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시화하였다.
돌봄의 시간 속에서 김지혜는 내면 깊숙이 묻어두었던 기억들, 그 기억 속 응어리진 감정들을 마주하였다. 그러자 선을 쌓는 이유도 달라졌다. 소모되고 사라지는 시간을 붙들기 위해 세필로 선을 쌓던 작가는 이제 그 기억 속의 자신과 화해하기 위해 선을 긋는다. 하나의 선 옆에 또 하나의 선이 그어지는 동안, 작가는 다른 모든 역할에서 놓여나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며 오롯이 자신을 돌아본다. 외부로 흩어졌던 주의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회복의 시간이다. 이때 작가에게 그림그리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가역적 시간의 통로가 된다. 그는 때로 과거에 머물고, 현재로 돌아오기를 유예하며 지나온 날의 자신을 돌본다. 그 자기돌봄의 시간은 소진되어 가던 자신을 보듬으며, 결국 스스로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Dry flowers> 시리즈 속 바스러질 듯한 감각을 넘어 의연한 아름다움을 머금은 시든 꽃은 작가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화면 위에 붙들어 놓은 시간의 흔적이다. 무수한 선이 축적되어 완성된 꽃의 형상은 작가의 시간이 화면 위에서 하나의 존재로 머물 수 있도록 붙들어 준 버팀목이다. 파편처럼 흩어진 시간들을 모아 붓질하던 순간들은 그렇게 작가의 꽃, 시간성을 담은 시든 꽃의 형상으로 오래 피어 있다.
김지혜의 돌봄의 시간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긴 시간을 통과하며 붓질의 의미는 또 한 번 변화를 맞는다. 그의 시선은 새로 맺은 관계들로 확장되고, 세필의 흔적에는 수많은 인연과 함께한 날들이 스며든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이어진 <Connected with flowers> 시리즈는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작가는 “마지막까지 주변을 밝히는 촛불처럼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꽃에 담아냈다”고 말한다.
최근작에 이르러 김지혜는 지나온 시간의 여러 의미를 한 화면에 아우른다. 10년 가까이 아침저녁으로 기록해 온 단상(斷想)을 시각 언어로 옮긴 <시간을 안아 꽃으로>(2026)에서는 그가 골라낸 수십 일의 기록이 모자이크처럼 엮인다. 이 화면에는 소멸을 견디던 꽃이 불현듯 다시 나타나는가 하면 바로 옆에 치유의 꽃과 타인을 향한 사랑의 꽃이 피어나기도 한다. 작가에게 쓰기와 그리기는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불확실성을 현재로 불러와 새롭게 재구성하는 과정이자, 나이듦을 받아들이는 법을 익히는 방식이다. 작가가 삶과 그림이 서로 닮기를 바라며 그은 선들은 우리가 늘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때로 지나온 자리로 되돌아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시드는 것들의 다정함>(2026)에서 작가는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닌 수많은 작은 순간의 축적”임을 강조하며, “사랑하기에 느끼는 불안과 그럼에도 사랑을 선택하려는 의지”를 이야기한다. 견딤과 치유, 불안과 사랑이 교차하는 하루하루가 쌓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시들어 가는 꽃들은 그렇게 오래 피는 마음이 된다.
1) 미국의 미술 작가 미얼 래더맨 유켈레스는 첫 아이를 낳은 뒤, 매일 반복되는 육아와 가사 노동이 예술은 물론 사회에서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자각에서 「유지관리 예술 선언문(Manifesto for Maintenance Art 1969!)」을 썼다. 그는 가사 노동이 작품 활동과 양립하기 어려운 여성 작가의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이 매일 수행하는 유지 노동 자체를 예술로 선언함으로써 돌봄을 포함해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예술의 자리로 끌어올렸다.
작가소개
김지혜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시각예술가다. 식물과 꽃을 관념적으로 재구성하여 인연과 관계, 생명과 소멸 사이에 시들어가는 과정을 시간성, 영원성이라는 주제로 탐구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2006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울, 제주 등지에서 6회의 초대전을 포함해 총 11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화랑미술제, 인천아시아 아트쇼, 서울아트쇼 등의 전시와 불가리아 Levski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비롯해 국내외 100여 회의 그룹전에 참여했다.